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피의 일요일 사건 (문단 편집) == 인민들을 쏘지 말아라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Расстрел на Дворцовой площади 9 января 1905 года.jpg|width=100%]]}}} || 1월 22일[* 당시까지 러시아에서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으로 1월 9일.] 일요일, 청원서 행렬은 오후 2시 경찰관 두 명이 가폰 신부를 경호하며 선도하는 가운데 겨울 궁전 앞 광장에 집결했다. 이 대열 앞에는 '병사들이여, 인민들을 쏘지 말아라'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들려 있었다. 당시 노동자들은 전혀 폭력적이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비참한 삶에서 유일한 희망이라고 믿은 황제에게 자신의 애국심과 충성심을 보이면서 행진하였다. 오히려 러시아 제국의 국가를 부르거나 차르와 왕조의 번영을 기원하는 기도나 노래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황제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기 위해 대다수 참가자가 교회에 갈 때처럼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왔고, 어린아이를 포함한 일가족이 다 함께 나온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이때 황제 일가는 전날인 토요일에 시외에 있는 차르스코예 셀로 별궁으로 휴가를 떠나 황궁을 비우고 있었고, 시위를 진압할 준비가 갖춰졌다는 보고만 전날 밤에 받았다. 황궁을 비롯한 주요 거점에는 근위연대를 비롯해 급히 배치된 1만에 달하는 군대만 대기하고 있었다. 경찰 당국에서는 차르가 황궁에 없다고 발표하면 행진이 취소되리라는 안일한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하지만 행진은 벌어졌고, 시위대가 시내 전역에 흩어져 있고 군경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보니 군경의 대응은 지리멸렬했다. 경찰 다수는 행렬에 참가했고 장교들도 시위대를 그냥 통과시키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경고도 없이 발포를 명령하는 이들도 있었다[* 최초의 발포는 오전 10시~11시 경에 이미 있었다고 한다.]. 군대가 일제사격을 가해도 군중이 바로 흩어지지 않자 [[카자크]] 기병들이 채찍과 군도를 휘두르며 사람들 속으로 돌입했다. 이리하여 거룩한 주일은 피의 일요일이 되고 말았다. 비무장 상태로 황제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평화롭게 행진하고 청원하는 군중들을 어떠한 교섭도 없이 무자비하게 학살한 것이다. 발포를 명령한 주체는 니콜라이 2세가 아닌 황제의 숙부이자 치안경찰 책임자인 [[https://ko.wikipedia.org/wiki/블라디미르_알렉산드로비치_대공|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Великий князь 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1847년]] [[4월 22일]] ~ [[1909년]] [[2월 17일]])이긴 했지만, 니콜라이 2세는 애초에 이 사태를 심각하게 판단하지 않았다. 가폰이 이미 예고했고 다른 황족들이 제발 황궁에 머물라고 권고했음에도 태연하게 주말이라고 휴가를 떠났고, 학살이 벌어진 그날도 일기에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다행히 충직한 군인들이 이들을 물리쳤다. 하느님이시여, 이들을 보우하소서."라고 써놓을 정도였다. 게다가 이후에도 계속 파업과 소요가 발생했는데 별다른 대책 없이 주위의 대신들이 "발포하면 된다"고 하니까 검토도 안 하고 발포했다. 인민들을 범의 아가리로 행진하도록 만든 장본인인 가폰 신부는 표트르 루텐베르크(Пётр Моисеевич Рутенберг, [[1879년]] [[2월 5일]] ~ [[1942년]] [[1월 3일]])라는 동료의 도움을 받아 살아서 도망쳤다. 혁명으로 사태가 악화되자 그 동료와 함께 [[런던]]으로 망명하고 [[사회혁명당(러시아)|사회혁명당]]에 가입했다.[* 가폰 신부가 수장으로 있었던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공장/제분소 노동자 조합은 애초에 비밀경찰 오흐라나에서 지원해 주던 어용 단체의 성격을 가졌다. 식료품의 부족과 높은 인플레이션은 노동자들과 시민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었던 당시 러시아의 상황에 누구나 정부에 불만을 많이 가지게 했고 이들 사이에 사회주의, 자유주의 사상이 조금씩 커가는 시기에 이를 경계한 황제와 오흐라나의 지원과 당시 러시아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던 가폰 신부에게 설립과 관리를 맡긴 것이다.] 하지만 니콜라이 2세의 10월 선언 이후 1906년 [[러시아]]로 돌아왔는데 자신을 살려 준 동료 루텐베르크에게 스스로가 경찰과 연락하는 [[프락치]]임을 스스로 밝혔고 결국 분노한 사회혁명당원들에게 밧줄 [[교수형]]으로 [[암살]]당하였다. 앞서 말했듯이 가폰 신부도 사전에 황제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편지를 보내는 등의 노력은 기울였다. 이 편지에서 가폰은 "폐하께서 노동자들을 만나서 청원을 들어 주면 노동자들은 폐하에 대한 충성심을 계속 가질 것이며, 폐하의 권위는 불가침으로 남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는 이 편지를 무시했다. 그러다보니 가폰 신부도 피의 일요일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아 니콜라이 2세에 대해 엄청난 배신감을 품었고 그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접었다. 분노한 가폰 신부는 영국 배를 빌려 무기를 러시아에 반입해 차르에게 복수할 계획을 세웠지만 배가 가라앉아 실패했고 결국 러시아 경찰과 손을 잡고 같이 피의 일요일 행진에 참여했던 루텐베르크에게 경찰의 첩자가 될 것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하고 그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가폰 신부가 다시 비밀경찰의 프락치가 된 이유는 자신의 어용 노조를 재건하기 위함이었는데 이미 러시아 노동자 사회에서 스파이, 어용 노조의 수장임이 드러난 상황에서 귀국해 세력을 회복하려다 발각당해 암살당했다. 가폰 신부의 암살을 주도한 인물인 [[사회혁명당(러시아)|사회혁명당]]의 예브노 아제프도 사실은 오흐라나에 포섭된 이중 스파이였다.[* 아제프가 밀고한 사람 중에는 [[보리스 사빈코프]]도 있었다.] 그러나 가폰 신부 사후 그를 연구하던 러시아 학자들의 연구 발표에 따르면 가폰이 오흐라나에 협조한 어떠한 기록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오흐라나가 관리하던 요원의 목록과 카드 파일에 등재되지 않았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 경찰의 특별 비밀 기록 보관소에도 가폰의 비밀 활동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당시 비밀경찰로 활동했던 요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가폰이 오흐라나에게 노동자 단체를 유지하는데 후원금을 받았지만 요원이 아닌 설립자이자 선동가로서 협력하도록 초청만 받은 인물이라는 증언도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동자의 파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모스크바]], [[사라토프]], [[바르샤바]] 등지에서 노동자들은 연일 시위에 나섰다. 그 결과 66개 도시의 44만 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항의의 표시로 작업을 중단했다. [[니콜라이 2세]]가 이때까지 이 사건이 얼마나 큰 파장을 가져올지 깨닫지 못하고 있던 사이 10월에는 대규모의 파업이 발생하여 러시아 경제는 파탄에 빠지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